책장을 덮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피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간절한 노래
소년이 온다
- 작가
- 한강
- 출판
- 창비
- 발매
- 2014.05.19.
- 평점
...............................추천사
어둠과 폭력의 세계 속에 상처 입은 존재들을 섬세하게 그려온 한강의 소설이 5월 광주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의 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증언하는 자의 소명의식과 듣는 자의 상상력이 치열하게 어우러지는 간절한 고백의 서사는 잊을 수 없는 ‘그 도시의 열흘’을 고통스럽게 되살린다. 물방울이 내쏘는 햇빛의 파편에도 눈이 시린 순결한 ‘어린 새’의 흔적을 쫓는 이 소설은 우리가 ‘붙들어야 할’ 역사적 기억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환기하고 있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다만 이제 더 절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응징과 복권의 서사이기보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일 것인데, 이를 통해 한국문학의 인간학적 깊이가 심화될 여지는 아직 많다.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 소설은 그날 파괴된 영혼들이 못다 한 말들을 대신 전하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파괴를 각오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엄의 위대한 증거를 찾아내는데,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함께 쓴 것 같은 문장들은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또 이런 추천사란 거짓은 아닐지라도 대개 과장이 아니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둘 다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 백지연 / 문학평론가
- 신형철 / 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섬세한 감수성과 치밀한 문장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온 작가 한강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가 출간되었다. 1980년 광주의 5월을 다뤄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 연재할 당시(2013년 11월~2014년 1월)부터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던 열다섯살 소년의 이야기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를 통해 한강만이 풀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1980년 5월을 새롭게 조명한다. 한강은 무고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진심 어린 문장들로 어느덧 그 시절을 잊고 무심하게 5.18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여전히 5?18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무한다. [소년이 온다] 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중학생 동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그후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받는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당시의 처절한 장면들을 핍진하게 묘사하며 지금 "우리가 '붙들어야 할' 역사적 기억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환기하고 있다(백지연 평론가)." "이 소설을 피해갈 수 없었"고,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작가 스스로의 고백처럼 이 소설은 소설가 한강의 지금까지의 작품세계를 한단계 끌어올리는,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신형철 평론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억울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오월의 노래 정대는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고,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공장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미루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그 봄에 행방불명되면서 남매는 비극을 맞는다. 무자비한 국가의 폭력이 한순간에 무너뜨린 순박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무고하게 죽은 어린 생명들에 대한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정대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대변된다. 5?18 당시, 인구 40만의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은 80만발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도 국가의 부조리에 맞서도록 어린 그들까지 시위현장으로 이끌었던 강렬한 힘은 다만 ‘깨끗하고도 무서운 양심’ 하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느끼며 수십만 시민들이 모여 만든 위대한 ‘양심의 혈관’을 함께 이루었던 것이다. 키가 자라고 싶었지.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총을 메고 창 아래 웅크려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들, 소회의실에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소설은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치욕스러운 고통이 되거나 일상을 회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모습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수피아여고 3학년 시절에 5?18을 겪은 ‘김은숙’은 '전두환 타도'를 외치는 데모로 점철된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담당 원고의 검열 문제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곱대의 뺨’을 맞기도 한다.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고귀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조활동을 하다 쫓겨난 ‘임선주’는 이후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가 상무관에 합류하게 되고, 경찰에 연행된 후 하혈이 멈추지 않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상무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대학생 ‘김진수’ 역시 연행된 이후 ‘모나미 볼펜’ 고문, 성기 고문 등을 받으며 끔찍한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 후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은 이러한 국가의 무자비함을 핍진하게 그려내면서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과거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인간의 잔혹함과 악행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꽃이 핀 쪽으로’이끌어주는 한강의 손길 한강은 이번 소설을 통해 열다섯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5?18 당시 숨죽이며 고통받았던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힘겹게 펼쳐 보이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그 시대를 증언하는 숙명과도 같은 소명을 다한다. ‘살아남았다’는 것이 오히려 치욕이 되는 사람들이 혼자서 힘겹게 견뎌내야 하는 매일을 되새기며, 그들의 아물지 않는 기억들을 함께 나눈다. 한강 작가는 "무덥고 습했던 여름 끝에 가로수 아래를 걷다가, 잘 마른 깨끗한 홑청 같은 바람이 얼굴과 팔에 감기는 감각에 놀라며 동호를 생각"한다. 따뜻했던 봄날의 오월을 지나 ‘그 여름을 건너가지 못한 동호, 이런 아침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동호’를 떠올리며 작가는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되새기고,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이들에게 어떠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가를 간절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리하여 이제는 더이상 억울한 영혼들이 없기를, 상처 입은 영혼들이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나아가 평온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5?18 희생자들의 ‘눈 덮인 무덤들’ 사이에서 못다 핀 소년 동호를 추모하기 위해 작가 한강이 마음을 다해 밝힌 작은 촛불들이 안타까운 세상에 온기를 더해줄 것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 pp.22~23)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
용서하지 않을 거다. (...)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 p.45)
팔굽혀펴기를 마흔번 연달아 하고 싶었지.
언젠가 여자를 안아보고 싶었지. 나에게 처음으로 허락될 여자, 얼굴을 모르는 그 여자의 심장 언저리에 떨리는 손을 얹고 싶었지. (...)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pp.57~58)
(/ p.116)
(/ pp.95~96)
(/ pp.206~207)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면)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그 아애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살이었다.
누군가 나를 불러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려준 건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해, 수유리 언덕배기 집에서 나는 아무 데나 틀어박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거나, 오빠나 남동생과 오후 내내 오목을 두거나, 엄마가 나에게만 시키는 일인 동시에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마늘 까기나 멸치 머리 때기 같은 일을 했고, 그러는 사이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주워들었다.
오빠가 가르친 애였어요?
초가을의 어느 일요일 막내고모가 식탁머리에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담임을 한 건 아닌데, 작문을 해서 내라고 하면 곧잘 쓰던 애여서 기억이 나. 중흥동 집 팔고 삼각동으로 이사 가면서 복덕방에서 계약을 했는데, 내가 ㄷ중학교 선생이라고 하니까 집 사는 사람이 활짝 반가워하더라고. 자기 막내아들이 1학년이라고, 몇반 누구라고, 그 반 가서 출석 부르면서 봤더니 아는 얼굴이었어.
그 뒤로 어떤 말들이 더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표정,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덮어두고 말을 이어가는 일의 어려움,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기억한다. 아무리 말을 돌려도 어느새 처음의 오싹한 빈자리로 되돌아오는 대화에 나는 이상한 긴장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치던 학생네가 중흥동 그 집을 샀다는 건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는가? 왜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끼어드는가?
*
그 한옥 마당에는 키 작은 동백나무 한그루가 심긴 화단이 있었다. 더워지기 시작하면 거의 검은빛이 도는 붉은 장미 꽃송이들이 넝쿨에 실려 담을 타고 올랐다. 장미가 시들 때쯤이면 문간채 외벽을 타고 커다란 흰 접시꽃들이 어른 키만큼 자랐다. 연한 녹색 페인트를 칠한 철제 대문을 열고 나가면 호전이라고 불리던 건전지 공장의 기나긴 담장이 보였다. 그 집을 팔고 도시 변두리로 이사가던 날 아침, 오동나무 장롱 모서리를 솜씨 있게 담요로 감싼 뒤 노끈으로 동여매던 아버지와 막내삼촌의 팔놀림을 기억한다.
새로 이사한 삼각동은 꽤 깊은 시골이었다. 뒤꼍에 높다란 살구나무가 있던 집에서 이년 가까이 지내다 우리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교사 봉급으로 손이래 형제들을 맡아 키웠던 아버지가, 막내고모까지 대학을 졸업시키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1980년 1월, 서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추운 도시였다. 수유리 언덕배기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임시로 석달간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벽이 합판 같은 재질이어서 바깥과 기온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방 안에서도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외투를 입고 솜이불을 둘러도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겨울 내내 나는 중흥동 집을 생각했다. 밑동을 흔들면 노란 살구들이 탁구공처럼 쏟아지던 삼각동 집도 나쁘지 않았지만, 잠깐 살아서였는지 큰 애착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외동딸을 위해 지어주셨다는, 태어나 아홉살까지 살았던 중흥동 옛집. 마루에서 부엌으로 건너가려면 지나야 하는 부엌머리 조그만 내 방. 여름이면 그 방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숙제를 했다. 겨울 오후에 장지문을 조금만 열고, 어쩐지 깨끗하게 느껴지는 햇볕이 고여 있는 마당을 내다보았다.
*
그들이 수유리 집에 온 것은 초여름 새벽이었다.
세시에서 네시 사이였다. 잠들어 있던 나를 엄마가 깨웠다. 일어나라. 불켠다. 내가 일어날 틈도 없이 바로 형광등이 켜졌다. 눈을 비비며 나는 일어나 앉았다. 건장한 사내 둘이 방에 들어와 있었다. 놀라는 나에게 잠옷 바람의 엄마가 말했다. 복덕방 아저씨들이 왔어. 집을 보려고.
깨끗이 잠이 달아났다. 나는 엄마에게 바싹 다가가 사내들이 옷장을 열고, 책상 밑을 살피고, 손전등을 들고 다락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캄캄한 새벽에 왜 복덕방 아저씨들이 찾아와 다락으로 올라갈까? 얼마 안 있어 다락에서 내려온 사내가 엄마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사내가 엄마를 부엌으로 데려가는 것을 나는 주춤주춤 따라갔다. 너희는 여기 있어. 굳은 얼굴의 엄마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뒤를 돌아보자 아빠와 어린 남동생이 속옷 바람으로 방에서 나와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안방에서 아버지가 누군가와 우렁우렁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문 대신 달아놓은 레이스 커튼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음성이 작아 한마디도 달아들을 수 없었다.
*
그해 추석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어른들은 목소리를 낮춰 대화했다. 마치 아이들이 감시자인 듯이. 우리 남매와 더 어린 사촌들이 못 듣도록 가만가만히.
당시 방위산업체에 다니던 막내삼촌과 아버지는 늦도록 안방에서 두런두런 대화했다.
새벽에 급습을 했어. 처음엔 강도가 든 줄 알았어. 부엌 쪽무하고 현관문을 동시에 부수고 들어왔어. 송 선배가 있을 거라고 확신을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전날 오후에 내가 송 선배를 만났어. 출판사에 찾아가서 전집 인세 사십만원을 미리 달라고 사정해서, 명동에서 잠깐 만나 전해줬더란 말이다. ……네 형수하고 나를 분리심문 하더라. 나중엔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같이 가면 남산 아니냐. 작년부터 사이가 멀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전화 도청되는 것 같으니까 조심하세요. 요즘 형님네 전화기에서 바람 소리 같은 게 나던데요, 그게 도청되는 잡음이랍니다. 제 친구 영준이도 도망 다닙니다. 재작년에 보안부대에 끌려가 열 손톱을 다 뽑혔잖아요. 이번에 잡히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부엌에서는 작은 엄마들이 엄마와 함께 음식을 만들며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눴다.
유방을 칼로 잘랐다요.
시상에……
뱃속에서 애기를 끄집어냈단 말도 있어라.
시상에 뭔 일이단가……
형님네 살던 집주인이 문간채를 사글셋방으로 내놨는디, 주인집 아들하고 동갑 먹은 애기가 그 방에 살았다요. ㄷ중학교에서만 셋이 죽고 둘이 실종됐는디, 그 집에서만 애들 둘이……
시상에……라고 여태 가느다란 탄식처럼 추임새를 넣던 엄마가 고개를 수그리고 침묵했다. 잠시 뒤 목소리를 낮춰 말하기 시작했다.
재작년에 희영 아가씨하고 선봤던 사람 말이여. 왜, ㄱ중학교 수학 선생 있었잖은가. 사람 괜찮았는디 우리하고는 인연이 안됐제. 그 사람 아내가 이번에 잘못되었다네. 만삭이었다든디, 집 앞에서 남편 기다리다가.
대전에서 온 둘째 작은엄마는 시상에……라는 추임새를 넣지 않았다. 소 같은 눈을 묵묵히 깜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엄마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광주 작은엄마가 이야기를 받았다. 나도 그 얘기 들었어라. 그것이 그 사람이었소?
애기 엄마는 총을 맞고 이미 죽어버렸는디, 뱃속에서 애기는 살아갖고 몇분을……
희영이 고모가 그 수학 선생님과 결혼했다면, 하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성립되지 않는 나의 어린 상상 속에서 스물여섯살의 고모는 동그란 배를 안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총알이 고모의 하얀 이마에 박혔다. 양희은 노래를 성악풍으로 따라 부르는 걸 좋아하는 희영이 고모의 뱃속에서 아기가, 눈을 뜬 아기가 물고기같이 입을 벌리며 꿈틀거렸다.
*
그 사진집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년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나의 어린 상상과 달리 이마에 총을 맞지도,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않은 희영이 고모가 잠깐 다니러 올라와 있었다. 어른들끼리 사진집을 돌려 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않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
상무관 바닥은 파헤쳐져 있었다.
마루가 뜯겨나간 자리에 드러난 검붉은 흙바닥으로 나는 내려가섰다. 고개를 들자 강당의 사면에 뚫린 커다란 창문들이 보였다. 마주 보이는 벽에는 아직 태극기 액자가 걸려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들도 철거되지 않았다. 반쯤 얼어붙은 흙을 밟으며 나는 오른편 벽을 향해 걸어갔다. 코팅된 A4용지에 필기체로 인쇄된 문구를 읽었다. 운동할 때는 신을 벗으세요.
현관 쪽으로 뒤돌아서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오래 방치되어 먼지 긴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강당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관중석에 걸터앉았다. 입을 열어 숨을 뱉자 김이 흩어졌다. 시멘트의 냉기가 청바지를 뚫고 올라왔다. 흰 무명천에 싸인 시신들과 태극기에 덮인 관들, 울부짖거나 멍하게 앉아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검붉은 흙바닥 위로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곳의 바닥이 파헤쳐지기 전에 왔어야 했다. 공사 중인 도청 건물 바깥으로 가림막이 설치되기 전에 왔어야 했다. 모든 것을 지켜본 은행나무들의 상당수가 뽑혀나가고, 백오십년 된 회화나무가 말라 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왔다. 어쩔 수 없다.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보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
이틀 전 남동생의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동생이 퇴근하는 대로 저녁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저물기 전에 중흥동 옛집을 찾아갔다. 어렸을 때 떠나왔으므로 나는 이 도시의 지리를 모른다. 3학년까지 다녔던 ㅎ초등학교로 일단 택시를 타고 갔다. 정문을 등지고 횡단보도를 건너, 기억을 더듬어 왼쪽 방향으로 걸었다. 문방구가 있었다고 기억되는 자리에 아직 문방구가 있었다. 문방구를 지나 조금 걷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야 했다. 몸에 새겨진 거리감을 믿으며 두번째 갈림길을 택했다. 끝없이 이어져 있던 호전 담장은 이제 없었다. 그 담장을 마주 보며 늘어서 있던 한옥들도 사라졌다. 기억에 따르면 그 길과 큰 도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집 한채 너비의 채석장이 있었다. 그 채석장과 담을 끼고 있던 한옥이 내 옛집이었다. 공터나 다름없던 채석장이 아직 도심에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끝에서 두번째 집을 찾아야 하리라.
단층집과 연립주택, 피아노 학원,도장 파는 집을 지나 마침내 길끝에 다다랐다. 채석장이 있던 자리에는 살풍경한 삼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옛집은 헐렸고 그 자리에 조립식 컨테이너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주방과 욕실 리모델링에 관계된 용품들 - 세면대, 수전, 싱크대, 양변기 -을 파는 가게였다.
무엇을 나는 기대했던 것일까? 유난히 환하게 불이 밝혀진 그 가게 앞에서 나는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오래 서성거렸다.
*
다음 날인 어제는 일찍부터 움직였다. 전남대의 5·18연구소와 상무지구의 5.18문화재단에 갔다. 칠십년대부터 중앙정보부가 상주하며 고문이 이뤄졌던 505보안부대는 출입문이 폐쇄되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오후에는 ㄷ중학교에 갔다. 소년은 졸업을 못했으니 졸업 앨범에 사진이 실렸을 리 없었다. 그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미술 선생님이 전화를 넣어주어 학적부를 열람할 수 있었다. 학생기록부용으로 찍은 그의 사진을 거기서 처음 보았다. 쌍꺼풀 없는 반달 모양의 눈이 유순했다. 턱과 뺨의 선에는 아직 유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무 평범해 누구와도 혼동될 듯한 얼굴, 눈을 떼는 순간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교무실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을 때 눈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눈발이 제법 굵어졌다. 속눈썹에 눈송이가 맺히는 것을 털어내며 택시를 잡았다. 전남대학교로 가자고 했다. 5.18연구소 일층 전시실에서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시질에는 여러대의 작은 PDP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고, 각기 다른 동영상이 반복해서 상영되고 있었다. 어느 영상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모두 처음부터 다시 봐야 했다. 신역에서 발견된 천년들의 시신을 실은 리어카가 행진하던 부분에서 비슷한 중학생이 보였다. 멀찌감치 서 있던 그 소년은 울음을 터뜨릴 듯 놀란 얼굴로 시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봄인데도 추운듯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빨리 스쳐지나간 장면이었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서 서서 영상이 맨 앞으로 되돌아가기를 기다렸다. 두번, 세번, 네번 반복해서 보았다. 그 소년 역시 너무 평범해 누구와도 혼동될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 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삼십삼년 동안 지하 밀실에 가둬둔 5.18 연행자들 수십명이 있다고 했다. 이제 비밀리에, 내일 오후 세시에 모두 처형할 거라고 했다. 꿈속의 시간은 저녁 여덟시였다. 내일 오후 세시까지 고작 열아홉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그걸 막을까. 말해준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휴대폰을 쥐고 어쩔 줄 모르며 길 가운데 서 있었다. 어디에 전화를 걸어 알려야 할까. 누구에게 알리면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이걸 왜 하필 나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나에게 달려줬을까. 빨리 택시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할까. 어디로 가서 어떻게……입속이 타들어가던 한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 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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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조그만 라디오를 선물받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계기판에 연도와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걸 받아들과는 '1980.5.18'이라고 입력했다. 그 일을 쓰려면 거기 있어봐야 하니까.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인적 없는 광화문 네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그렇지, 시간만 이동하는 거니까, 여긴 서울이니까. 오월이면 봄이어야 하는데 거리는 십일월 어느날처럼 춥고 황량했다. 무섭도록 교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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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2013년 1월의 서울 거리는 며칠 전의 꿈속처럼 황량하고 차가웠다.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예식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사람들에게 변변히 변명하지 못한 채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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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눈이 퍼부었나 싶게 맑은 날씨다. 상무관 벽면의 유리창으로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쏟아져들어온다.
바닥이 너무 차가워 나는 일어선다. 계단을 밟아내려가 출입문을 열고 강당 밖으로 나간다. 시야를 막아선 거대한 가림막을, 그 사이로 드러난 하얀 외벽의 모서리를 바라본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지만 기다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기다린다.
처음 혼자서 망월동을 찾았던 스무살의 겨울을 기억한다. 묘지 언덕의 무덤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그를 찾고 있었다. 그때까지 성은 몰랐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엿들은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막내삼촌의 이름과 비슷해 얼른 외워졌던, 만 열다섯살의 동호.
묘지에서 시내로 나오는 마지막 차편을 놓쳐,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도로를 따라 바람을 등지고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무엇이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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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님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집단발포 직전인 5월 21일 오전, 군용 헬기를 타고 와 그 도시의 땅을 밟는 그의 영상을 보았다. 젊은 장군의 태연한 얼굴. 성큼성큼 헬기를 등지고 걸어와, 마중 나온 장교와 힘차게 악수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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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준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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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소녀의 얼굴이 있다.
열두살의 내가 사진첩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본 그 여자애는 뺨과 목이 총검에 찢긴 채, 비스듬히 한쪽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터미널 대함실에, 기차역 앞에 그런 참혹한 시신들이 누워 있었을 때, 군인들이 행인들을 때리고 찌르며 반벌거벗겨 트럭에 실어갔을 때, 집에 있던 젊은이들까지 수색해 끌고 갔을 때, 도시 외곽이 봉쇄되고 전화는 불통이었을 때, 맨몸으로 항의하는 군중들을 향해 실판이 발포되었을 때, 이십여분 만에 백여구의 시신이 도로에 널브러졌을 때, 모두 몰살될 거라는 소문이 불붙은 듯 퍼져갔을 때, 예비군 훈련장에서 구식 총기를 꺼내온 평범한 남자들이 동네 초등학교에, 하천 다리에 삼삼오오 모여 보초를 섰을 때,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권력을 대신해 도청에서 시민 자치가 시작됐을 때,
그때 나는 수유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에 돌아오면 대문 안쪽에 떨어져 있는 석간 ㄷ일보를 집어들고, 좁고 긴 마당을 따라 걸으며 머리기사를 읽었다. 광주 무정부 상태 5일째. 사진 속의 검게 그을린 건물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남자들로 가득한 트럭. 집안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침통했다. 언돼, 오늘도 전화가 안돼. 대인시장통의 외가에 엄마는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희영이 고모가 무사했던 것처럼 나는 무사했댜. 일가친척 중 누구도 다치거나 죽거나 끌려가지 않았다. 다만 그해 가을 나는 생각했다. 차가운 장판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숙제를 하던 방, 그 부엌머리 방을 그 중학생이 쓰지 않았을까. 내가 건너온 무더운 여름을 정말 그는 건너오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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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중인 도청 앞 지하도를 건너, 네온사인과 음악이 요란한 밤 거리를 거슬러 나는 걷는다. 이틀 전에 찾아갔던 대형 입시 학원에 다다른다. 일층에 안내 데스크가 있다. 학원 홍보 브로슈어와 강의 시간표, 인기 강좌의 컬러 전단지들이 데스크 앞에 진열돼 있다.
삼십분 이상은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라고 어제 그는 전화로 말했다.
다섯시 삼십분에 제 강의실로 오세요. 양해해주십시오. 저녁을 빨리 먹고 미리 들어와 공부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엔 삼십분도 대화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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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동 옛집 터에서 서성거리다가 결국 나는 리모델링용품 가게로 들어갔었다. 연보라색 점퍼를 입은 오십대 여자가 신문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오셨소?
어렸을 때 이 도시를 떠난 뒤로는 친족만이 이곳의 방언을 써왔기 때문에, 이 도시에 온 직후부터 나는 낯선 이들이 친족처럼 행동하는 것 같은 이상한 불편함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 예전에 한옥이 있었는데……언제 이 건물이 들어섰나요?
내가 불편함과 슬픔을 느끼는 만큼 여자는 내 서울말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깍듯한 서울말로 그녀는 되물었다.
여기 살던 사람 찾아오셨어요?
달리 대답할 방법이 없어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 집은 재작년에 헐렸어요.
무덤덤하게 그녀는 말을 이었다. 혼자 살전 할머니가 있었는데 돌아가셨다더라, 워낙 오래된 집이라 세를 놓을 수 없어 아들잉 집을 허물고 가건물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가 들어오긴 했는데 목이 너무 안 좋아 이년 계약만 채우고 나갈 거다.
그 아드님을 만나보셨느냐고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계약할 때 만났죠. 큰 학원 강사라던데요. 그래도 벌이가 썩 좋진 않으니까 이런 가건물을 올렸겠죠.
가게를 나와 큰길을 따라 오래 걷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녀가 알려준 이 학원으로 와, 홍보 브로슈어에 실린 사진들 속에서 소년의 형을 찾았다. 어렵지 않았다. 강씨 성을 가진 강사는 둘뿐이었고 그중 한사람은 이십대였다. 사진 속 중년의 과탐 강사는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앞머리가 희끗하게 세었으며, 흰 와이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맨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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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수업을 일찍 끝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늦어졌네요.
앉으세요. 음료수 드시겠습니까.
그 집이 동호 가르치던 선생님 댁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소식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사실 고민했습니다. 나는 할 말도 없는데 만나면 뭐하나. 그러다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니까.
그럼요, 어머니가 계셨다면 망설이지 않고 만났을 겁니다. 놔주지도 않고 끝없이 동호 이야기를 했겠죠. 삼십년 동안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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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이부자리를 깔아준 현관 옆 작은방에서 몸을 뒤척이며 밤을 새운다. 깜박 잠들 때마다 그 학원 앞 밤거리로 나는 돌아가 있다. 열다섯살의 동호가 건너가지 못한 나이의 훤칠한 고등학생들이 내 어깨를 스쳐지나간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심장을 누르듯 가슴 왼편에 오른손을 얹고 나는 걷는다. 캄캄한 도로 가운데에서 얼굴들이 어슴푸레 빛난다. 살해된 사람들의 얼굴, 내 가슴에 대검을 박아넣은 살인자의 공허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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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싸움을 하면 항상 내가 이겼어요.
그애는 간지럼을 많이 탔거든요.
내 엄지발가락이 그애 발에 닿기만 해도 그애는 몸을 뒤틀었어요.
꼬집혀서 아픈 건지, 간지러워서 그런 건지 알 수 없게 오만 인상ㅇ을 쓰면서,
귀하고 이마까지 빨개지면서 웃어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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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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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
아니, 나는 누구도 무덤가에서 만자지 않았다. 잠든 동생에게 메모를 써 식탁에 놓아두고 새벽에 아파트를 나왔을 뿐이다. 이 도시에서 모은 자료들 때문에 무거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에 실려 이곳으로 왔을 뿐이다. 꽃을 사지 못했다. 술도 과일도 준비하지 못했다. 찻주전자를 덥히는 작은 초가 들어 있는 상바를 동생의 싱크대 서랍에서 발견해, 라이터와 함께 세개를 집어왔을 뿐이다.
망월동 구묘지에서 지금의 국립 신묘역으로 이장을 하고 나서부터 어머니가 이상해졌다고 그의 형은 말했다.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 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눈 덮인 무덤들 속에서 마침내 그의 것을 찾아냈다. 오래전에 찾았던 망월동 그의 묘에는 사진 없이 이름과 생몰 연도만 있었는데, 이제는 학생기록부에 있던 것을 확대한 흑백사진이 묘비에 붙어 있었다. 그의 오른편과 왼편 무덤은 모두 고등학생들의 것이었다. 아마도 중학교 졸업 사진일 검은 동복 차림의 앳된 얼굴들을 나는 들여다 보았다.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젖은 양말 속 살갗으로 눈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만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가 한강^^
<소년이 온다>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소설 속에 어떤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그런 의문과 의심과 회의 속에서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서 그걸 뚫고 나가보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인간을 껴안고 싶고, 그렇지만 그게 잘 안 되고, 그렇지만 더 나아가고 싶고.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었는데 <희랍어 시간>이란 소설을 쓸 때 제가 인간을 껴안는 일에 근접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거기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소통하기 위해서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대화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대목을 쓸 때,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장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을 끝마치고 나서는 아주 따뜻한, 인간의 아주 환한 지점을 더듬는 그런 소설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쓰려고 노력을 했는데 의외로 잘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안 되는가를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80년 5월, 제가 어린 나이에 간접 체험했던 광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당시 제가 느낀 것은 신군부에 대한 분노라든지 증오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인간은 이토록 잔인한 존재인 것인가, 그런데 그런 죽음을 무릅쓴다는 건 또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이 깊이 새겨졌던 사건이거든요. 그리고 그걸 계속 묻어두고 긴 시간을 지냈던 거고요. 그런데 내적인 탐색의 과정에서 '왜 내가 인간을 껴안기가 이토록 어려운가?'라는 질문의 끝에 80년 5월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지 글쓰기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됐고요.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룬다는 점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어요. 지금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계시기 때문에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리고 당시의 참혹한 이야기들을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취재를 하면 할수록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던 그런 야만의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늘 그만 쓰고 싶었지만, 또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제가 알았기 때문에 더 써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진 거죠. 정말 그걸 겪은 분들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니까 잘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힘드니까 그만 쓰고 싶다는 생각과 그러니까 더 잘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계속 부딪히면서 어떻게 끝까지 쓰게 됐어요. 그리고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처럼 소년이 34년을 건너서 우리에게 한발 한발 걸어오는 그런 이야기였으면 했고요. 저의 개인사도 거기 파편처럼 넣어서 이것이 지금 여기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담고 싶었어요. 광주라는 게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얼굴을 바꿔서 우리에게 계속 돌아오고 있고 어쩌면 우리가 지금도 광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소년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그런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고요. 정말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아주 복잡하고 위태롭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해요. 특히 인간의 존엄함은 무척 연약한 것이고요. 유리가 거기 있는지도 몰랐지만 깨지고 나면 유리가 깨졌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요. 되돌릴 수 없는 거라서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인간의 존엄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을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그런 거란 생각을 요새 하고 있어요. 요즘 저의 고민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생각으로 많이 나가고 있는데요. 특히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인간의 참혹과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들여다보게 됐고요. 그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소설을 썼어요. 생각해보면 이전 소설들에서도 주인공들이 육식을 밀어내면서 또는 언어를 밀어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잠깐 이 세계로부터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을 확보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앞으로 쓰게 될 소설도 제가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에 굉장히 간절하게 닿고 싶었던 그런 존엄에서 출발할 것 같아요. 인간의 존엄을 고민한다는 게 인간을 껴안고자 하는 사랑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음 소설은 바라건대 어둡기보다는 사랑에서 출발하는 그런 소설이었으면 해요. 보르헤스가 만년의 인터뷰를 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백발에 주름진 얼굴로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것은 일생을 화해하지 않고 누구에게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잘 표류하면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해요. (지식인의 서재 '한강' 편은 양재동 작업실에서 촬영했습니다.)
........................독후활동 ▶ 시대적 배경 살펴보기 ▶ 5.18 민주화운동다시 돌아보기 ▶ 느낀점을 글로 표현해보기 .........................중2 박** 학생의 글 이 책은 내가 읽었던 책과는 달리 따옴표로 대화글을 나타내지 않고 줄글로 넘기거나 글을 기울여서 표현한 부분이 독특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쓴 글이다.책을 읽으면서 2년전 세월호에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해도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는것이 과연 옳을까? 총을 버리고 항복한 소년들까지도 총에 맞아 죽게되는 장면을 보고 과연 정당할까? 하는 의문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나에겐 가슴이 아팠던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계속되는 현실이고 꺼낼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 슬픔이 더 커지는듯싶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5.18민주화 운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